60대 김순자 씨는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가족 생일상, 명절 음식, 손주 도시락까지 어느 하나 손이 가지 않는 게 없었다. 그러나 60대를 지나면서 그는 요리의 중심이 ‘레시피’가 아닌 ‘향신료’에 있음을 알게 됐다.
평소에는 이름조차 몰랐던 고수, 큐민, 스모크 파프리카, 펜넬 같은 향신료들이, 음식 맛을 완전히 바꾸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는 사실이 그에겐 큰 충격이자 즐거움이었다. 김순자 씨는 그렇게 요리 자체보다 ‘향신료 배합’에 매료되었고, 이후로는 각국의 향신료 조합을 연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취미에 빠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의 향신료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향신료 레시피북을 만들어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미각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1. 향신료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문화의 언어'다
김순자 씨가 처음으로 향신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연히 먹게 된 인도 커리 때문이었다. 집에서 만든 카레와는 전혀 다른 깊고 이국적인 풍미에 놀란 그는,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단순히 '카레 가루'가 아니라 개별 향신료의 배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인도식 가람 마살라, 중동의 자타르, 멕시코식 타코 시즈닝, 동남아의 삼발(삼발 오엘렉) 등 다양한 나라의 대표 향신료 믹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단순히 음식 맛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었다. 각 향신료가 탄생한 배경, 기후, 종교,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향신료는 어느덧 ‘문화의 언어’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레몬 껍질을 말린 ‘드라이드 레몬’과 고수, 커민, 시나몬이 섞인 조합이 자주 사용되며 이는 고온 건조한 지역에서 장시간 조리되는 음식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동남아시아는 무더운 기후로 인해 생선 비린내를 잡는 라임 잎, 레몬그라스, 고추 등이 기본 베이스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김순자 씨는 향신료 하나하나를 직접 사서 냄새를 맡아보고, 조합을 달리해 가며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수는 비누맛 같다, 계피는 생각보다 달콤하다 정도였지만, 점차 카다몸은 생강과 시나몬의 중간 느낌이며, 우유와 함께 사용하면 인도식 밀크티의 기초가 된다는 식의 구체적인 감각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단순히 외국 음식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향신료 조합 원리를 한국식 식재료에 응용해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고등어 조림에 일본의 유자코쇼를 넣어보거나, 된장찌개에 약간의 큐민을 넣어 이국적인 깊이를 주는 실험을 하면서 그만의 ‘퓨전 향신료 조합법’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순자 씨의 부엌은 점점 더 ‘세계의 향신료 실험실’로 바뀌어갔다.
2. 레시피북을 쓰는 취미, 미각의 기록을 남기는 방법
많은 이들에게 ‘레시피북’은 요리책이거나 종이 위에 정리된 조리법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김순자 씨에게 향신료 레시피북은 단순한 조리법 모음이 아니라, 그의 감각과 경험을 기록한 ‘미각의 일기’였다.
그가 처음 향신료 레시피북을 만들기 시작한 건 순전히 개인적인 기록 목적이었다. 어떤 조합이 좋았고, 어떤 음식과는 맞지 않았는지를 기록해두지 않으면 자꾸만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노트 한 켠에 계피 + 큐민 + 팔각 = 고기찜에 적합, 로즈마리 + 바질 + 오레가노 = 토마토 요리에 잘 어울림 같은 식으로 메모하던 것이 점차 체계화되었다. 향신료의 향, 색, 맛의 강도, 어울리는 식재료 등을 항목별로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한 권의 ‘나만의 향신료 백과’가 완성된 것이다.
이 레시피북의 가장 큰 특징은 ‘기억 중심’이다. 예를 들어, 그는 단순히 “스모크 파프리카는 훈연 향이 강하다”고 적기보다는, 할아버지의 연탄불 냄새처럼 구수한 향 이라고 기억을 붙여 설명한다. 그렇게 냄새와 맛을 감정이나 추억과 연결하면, 단순한 재료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계절과 기분에 따라 선호하는 향신료가 달라지는 점도 주목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계피, 정향, 넛맥 같은 향이 자주 쓰이고, 여름에는 산뜻한 딜, 민트, 고수 같은 것이 입맛에 맞았다. 그는 이런 흐름까지도 꼼꼼히 기록하여, 계절별 향신료 조합 가이드도 작성했다.
지금 김순자 씨의 레시피북은 총 3권이다. 첫 권은 기본 향신료에 대한 소개와 사용법, 두 번째 권은 나라별 향신료 믹스 정리, 세 번째는 본인이 직접 실험하고 조합해본 퓨전 조리법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이 기록들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자녀와 손주에게도 종종 복사해 나눠주고 있다. “내 경험이 다른 사람의 입맛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단순한 취미 이상으로 이 기록이 가진 의미를 엿볼 수 있다.
3. 향신료 취미를 통해 떠나는 '집 안의 세계 여행'
여행이 쉽지 않은 시니어들에게 향신료 취미는 ‘미각을 통한 세계 여행’이다. 김순자 씨는 매주 하루를 정해 ‘테마 국가의 날’을 운영한다. 이날만큼은 외출하지 않고, 해당 국가의 요리를 만들고, 음악을 틀며, 간단한 문화 정보를 공부한다. 예를 들어, ‘모로코의 날’에는 하리라 수프와 쿠스쿠스를 만들고, 모로코 전통 음악을 틀어놓는다. 레시피는 물론 그에 맞는 향신료도 직접 배합해서 만든다.
이런 하루는 단순한 요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향신료의 향을 맡는 순간, 머릿속에는 그 나라의 기후, 사람들, 풍경이 상상된다. 김순자 씨는 향은 눈을 감아도 여행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것 이라며, 직접 가보지 못한 나라라도 향신료만 있으면 마음속 여행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향신료는 사람과의 대화 도구이기도 하다. 그는 향신료 취미를 시작하면서부터 손주들과의 대화가 훨씬 풍성해졌다고 한다. 손주가 이건 무슨 냄새야? 하고 물으면, 김순자 씨는 그건 터키에서 자주 쓰는 향이란다. 가끔 디저트에도 넣는단다 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향신료는 세대와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니어 향신료 입문 강좌’를 열어, 같은 또래들과 함께 향신료를 배우고 공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모두가 처음엔 이 나이에 무슨 향신료냐고 웃지만, 수업이 끝날 무렵엔 각자 좋아하는 향신료 하나쯤은 꼭 찾게 된다. 향신료는 그렇게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향신료는 작지만 강렬한 존재다. 특히 시니어들에게 향신료 취미는 단순한 요리의 재료를 넘어, 기억을 환기하고, 문화와 연결되고, 감각을 확장시키는 놀라운 취미로 자리잡을 수 있다. 김순자 씨처럼 향신료를 통해 일상의 풍미를 풍성하게 만들고, 세상과 소통하며, 나만의 레시피북을 완성해가는 여정은 어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요리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이제는 맛의 ‘뿌리’를 찾아 향신료의 세계로 한 발 들어서보자. 지금, 집 안에서 시작되는 세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